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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0세 천문학 대부 고물상 찾는 사연 "나는 천문 수리공" (2023-05-01)
작성일
2023.09.22
작성자
천문대
게시글 내용

나일성 명예교수, 국내 첫 현대 천문학 및 우주과학 전파
연세대 천문학 박사학위 및 천문대 발족 등 후학 양성
인생 전부 '星'과 함께···은퇴 후에도 선조 천문관측술 복원 매진

나일성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명예교수는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등 관측천문학을 우리나라에 도입, 국내 천문학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천문학계 대부다. 1932년생으로 올해 만 90세다.[사진=김지영 기자]
나일성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명예교수는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등 관측천문학을 우리나라에 도입, 국내 천문학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천문학계 대부다. 1932년생으로 올해 만 90세다.[사진=김지영 기자]
나일성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명예교수는 1932년생 올해로 만 90세다.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등 관측천문학을 우리나라에 도입, 국내 천문학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천문학계 대부다.

나 교수는 이름 끝자 별 성(星)처럼 별과 일생을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은퇴한 지금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실록 등 우리나라 역서에 등장하는 천문관측 기록을 주시하며 연구하고 있다.

최근 천문학계가 조선시대 천문관료의 혜성관측 사료'성변측후단자'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움직이는 가운데 관계자로부터 나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천문학계의 가치 있는 자료들이 그의 손에서 복원되고 있어 중요한 인물이라는 설명이었다. 

나 교수와 연세대 인근 연희동 자택에서 만나기로 했다. 연세대에 사무실이 있지만 이곳에 연구자료가 훨씬 많다고 했다.(경북 예천 연구실에는 더 많은 자료가 있다.) 굽이진 골목에 들어선 많은 건물 사이 옥상에 세워진 둥근 돔이 보인다. 나 교수의 자택이다.

현관을 지나 1층에 마련된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니 수많은 천문자료들로 별천지다. 그의 손에서 세월의 때를 벗고 복원된 천문자료들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정리돼있다. 수많은 포트폴리오 속에서 그의 수십 년간 연구일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나 교수는 기자에게 무엇이 궁금하냐 질문했다. 별과 함께한 일생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말하니 여러 자료들을 꺼내준다. 찬찬히 둘러볼 시간이 주어져 자료들을 1시간 읽었다. 그리고 그와 낮부터 저녁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 소년, 별에 빠지다

중앙관상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사진=나일성 교수]
중앙관상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사진=나일성 교수]
나일성 교수의 오랜 별명은 '별똥'이다. 좋아하는 것에 이유를 붙이기 어렵듯, 어릴 때부터 밤하늘별에 끌렸다. 친구나 주변사람들 모두 그를 별똥으로 불러주었다. 나 교수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어 편지마다 이름 대신 별똥으로 서명하곤 했다.  

학창시절 나 교수는 방과 후 헌책방에 가는게 일과였다. 당시엔 과학이나 별에 대해 공부할 책이 없어 관련 서적을 구하면 운수대통한 날이었다. 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던 그는 한국 근세 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원철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전쟁 통에 편지가 잘 닿지 않았는지 답신을 받지 못했다.

그는 연희대(현 연세대)천문기상학과에 진학했다.  이원철 박사가 연희대 출신이니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감 때문이었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다. 별 대신 물리학을 공부하는 날이 많아 회의감도 느꼈다. 

그 때 중앙관상대(현 기상청)에 근무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업했다. 당시 이원철 박사가 중앙관상대 대장을 맡고 있었다. 말단사원이던 그는 이원철 박사의 2시간짜리 우주론 강의를 평생 잊지 못한다. 

나 교수는 중앙관상대에서 3년간 별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알렸다. 혜성이 나타난다고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아무도 그 정체를 몰랐던 시기, 나 교수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그 정체를 알았고 브리핑했다. 

"어떤 혜성일까 알아보며 혼자 애를 쓰다 일본 천문대 대장에게 편지를 썼죠. 회신으로 일본 천문학회 월보를 받았는데 거기에 어떤 혜성이 오는지 쓰여 있더군요. 이원철 박사께 다가오는 혜성이 무르코스 혜성이라는걸 말씀드리고 언론 등에 브리핑했던 기억이 나네요."

중앙관상대 앞에서 동료들과(맨 오른쪽) 나일성 교수.[사진=나일성 교수]
중앙관상대 앞에서 동료들과(맨 오른쪽) 나일성 교수.[사진=나일성 교수]
개기일식으로 중앙관상대에 또 많은 언론이 집중됐을 때도 나 교수가 나섰다. 그는 관상대 작은 망원경 렌즈에 셀로판테이프를 여러 겹 겹치고 구멍을 내 개기일식의 흑점 촬영을 하는데도 성공했다. 당시 신문기자가 허술한 망원경에 '예산을 왜 안 쓰냐'는 질문도 했지만 그는 "당시엔 천문학에 예산을 쓰는 일이 더욱 쉽지 않았다. 불평불만을 더욱 할 수 없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밤하늘의 별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던 그는 정확한 일기예보에도 이 지식을 활용했다.

"구름의 양, 바람, 습도, 온도, 기압 등을 매시간 적어 다른 나라의 데이터들을 종합해 고압선을 그리는 등 예보자료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달이 없는 밤에는 구름의 양 등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죠. 저는 별들이 자리 잡은 위치를 잘 알고 있었어요. 별이 가려진 것을 계산해 구름의 양 등을 예측해 적을 수 있었죠."

그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며 정말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헛헛했다. 제대로 천문학을 하려면 학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로 돌아간 그는 졸업 후 대학원에 입학해 유일하게 천문학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며 학생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부족했다. 천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는 스스로를 엉터리라 느꼈다. 63년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로 서방국가가 충격을 받았던 시기, 미국은 이공계에 많은 예산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등록금과 생활비 등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탔다. 거기서 처음 거대 망원경을 봤을 때 압도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에게 친절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별을 보며 데이터를 정리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묘하게 한 시간 정도 예측이 다르다며 한 교수에게 '넌 별연구 하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1년 뒤 별에 잘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국제천문연맹에 그의 데이터가 보고되며 억울함은 풀렸지만(그 교수로부터 인정받아 후엔 많은연구를 함께했다고 한다) 이방인으로서 취급은 그에게 독기를 품게 했다. 

◆ 귀국 후 현대천문학과 우주과학 소개, 후학을 키우다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해 연세대에서 강연하는 나 교수 -.[사진=나일성 교수]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해 연세대에서 강연하는 나 교수 -.[사진=나일성 교수]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그는 1974년 재미 과학자 유치계획으로 연세대 교수로 귀국한다. 미국에서 더 좋은 자리는 거들떠도 안 봤다. 그는 "한국 천문학을 일으켜야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며 귀국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현대 천문학 및 우주과학을 소개했다. 또 한국 첫 항성의 광전측광 관측을 시작했고, 각 대학과 연구소에 관측 기술을 보급했다. 두개의 별이 마치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쌍성분야 관측 연구도 개척했다. 국내 천문학 연구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망원경을 거의 혼자 쓰다 보니 쌍성분야 데이터는 전 세계 중에서도 나 교수가 제일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국내 대학 중 연세대에 천문학 박사학위 제일 먼저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980년 세워진 연세대 천문대도 그의 주도 하에 발족했다. 당시 연세대 천문대학은 일산 삼애캠퍼스에 지어졌는데,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아 밤에 별을 연구하기 좋았다고 한다. 국내 최초 핼리혜성을 사진으로 찍는 등 많은 연구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지금은 빛공해로 일반인과 초중고 학생을 위한 과학대중화 사업 교육장으로 사용 중이다. 

이 외에도 한국우주과학회 설립과 동양천문학국제회의 발족에도 그가 있었다. 아시아가 천문학 무대에서 마음껏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장(場)을 만든 것이다. 이 회의는 한국, 중국, 일본. 태국, 호주 등에서 꾸준히 열리고 있다. 나 교수는 이 국제회의에서 세종대왕이 한글뿐 아니라 천문학에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학교에 천문학과가 생기고 많은 학생과 교수가 근무하면서 교내 천체망원경을 함께 써야했다. 연구가 더디자 그는 거액의 사비를 들여 집 옥상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하고 밤마다 별을 관찰했다. 연구를 위해 학생들도 자주 그의 집을 찾았다.[사진=나일성 교수]
학교에 천문학과가 생기고 많은 학생과 교수가 근무하면서 교내 천체망원경을 함께 써야했다. 연구가 더디자 그는 거액의 사비를 들여 집 옥상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하고 밤마다 별을 관찰했다. 연구를 위해 학생들도 자주 그의 집을 찾았다.[사진=나일성 교수]
대학생뿐 아니라 별에 관심 있는 대중에게 천문학을 강의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연세대 강의실 하나를 밤에 오픈해 3년간 강연하고 옥상에서 별자리도 가르쳤다. 그때 만난 두 명의 고등학생은 실제 천문학자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아마추어 조직체가 되어 움직였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가 강연했다. 대중에 천문학을 전하기 위해 100여 편의 과학해설도 썼다.

이 같은 업적을 계기로 일본 아마추어 천체관측가인 와타나베 가쓰오(渡邊和郞)씨는 지난 95년 8월21일 삿포로과학관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나일성 교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한국이름이 붙은 소행성은 세종대왕과 백제인 관륵에 이어 세 번째다. 

◆ 천문연 초대 원장직 거절,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교수로 있을 무렵 한국천문연구원이 정식 발족했다. 당시 과기부에서 초대 대장으로 그를 임명하려했지만 그의 대답은 NO였다. 연구할 사람이 없으니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의 지도교수를 동원해 그를 설득했지만 후학양성이 우선이라 생각해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천문연 대장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장문의 편지로 써 당시 과기부 차관에게 보냈다. 

그의 소신은 후배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강영운 교수, 김천휘 교수, 이은희 박사, 장헌영 교수, 한원휘 박사 등 많은 제자들이 후학을 키우고 연구하며 우리나라 천문학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생 남는게 뭐 있겠는가. 난 학교에 남았던걸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도 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길 백번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나는 천문도 수리공이요"

그는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예천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빛 공해가 심해져 서울에서 별 관측이 어려워졌던 이유가 크다. 하지만 아쉽게도 천체망원경을 옮긴 후 천둥번개에 맞아 천체망원경이 고장났다. 하지만 그동안 축적한 많은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또 다른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사진=나일성 교수] 
그는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예천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빛 공해가 심해져 서울에서 별 관측이 어려워졌던 이유가 크다. 하지만 아쉽게도 천체망원경을 옮긴 후 천둥번개에 맞아 천체망원경이 고장났다. 하지만 그동안 축적한 많은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또 다른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사진=나일성 교수] 
관측천문학자로서의 지난날은 체력적으로 고단했다. 밤엔 별을 관찰하고, 낮엔 학생을 가르치다보니 밤낮을 제대로 지킨 날이 몇 없다. 

연구는 집에서도 계속됐다. 집에 고가의 천체망원경을 설치해 매일 밤마다 옥상에 올랐다. 학교에 천문학과 교수와 학생이 늘면서 천체망원경 쓸 시간이 부족해 집에 설치한 것인데, 지도했던 학생들도 자주와 연구했다. 96년 이후에는 빛공해가 심해져 예천으로 장비를 옮겼다. 아쉽게도 천체망원경은 번개에 맞아 고장 났지만 많은 자료들이 예천에 있어 자주 오간다. 건강 체력 덕분에 장거리 이동에 큰 힘이 들지 않는다. 그는 "일하는 게 보약이고 잔 숨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은퇴한지 20년, 그는 이제 선조들의 천문관측술을 복원하고 업적을 분야별로 분류해 후학들의 참고자료로 남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천문학을 전공한 둘째 딸이 이 일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나 교수가 복원한 자료만 수백 개다. 고려사의 천문지와 조선시대 승정원일지 속 고대 천문도, 국내 유일 혼합식 천문도 원형, 훼손이 심했던 법주사 병풍식 신법 천문도 등이 그의 손에서 복원됐다. 이 외에도 역서를 복원해 읽기 쉬운 한글로 소개하는 과학고서 해제집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2019년 첫 권을 시작으로 지난 2월 과학고서 해제집 마지막 3권을 출판하고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앞으로도 여러권의 출판을 준비 중이다.

그는 천문학을 전공한 둘째딸과 함께 역서복원에 힘쓰고 있다. 그가 정리한 포트폴리오는 여러 방에 차곡차곡 나뉘어 정리돼있다.[사진=김지영 기자]
그가 역서 복원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이유는 간단하다. 후손에게 유산을 남겨야한다는 사명이다. 처음엔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기상대 근무당시 알고 지내던 선임이 보관하던 역서 15권을 넘겨받았습니다. 한자로 적혀 어렵긴 했지만 찾아보며 해석하는 재미가 있었죠. 그러면서 출장을 갈 때마다 고물상에 들러 천문학과 관련이 없는 역서들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이 돌았는지 역서를 가져다주는 사람도 생겼죠. 물론 원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정사정해도 선조가 쓴 글이라며 팔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복사본이라도 받을걸 이라며 후회되기도 해요."

그는 "역서를 현대어로 번역하고 천문관측술을 복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연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강조한다. 천문학은 과거의 자료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로 핼리혜성은 약 75년~76년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하는 단주기 혜성이다. 가장 최근 근접한 시기는 1986년이다. 다음 근일점은 2061년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에서 핼리혜성이 관측돼 남은 기록도 있다. 1759년 35명의 관료가 25일간 핼리혜성을 관측하며 이동경로, 위치, 밝기 등 세세한 기록을 그림으로 남겨둔 '성변측후단자'다. 우리나라 천문학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자료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과거 자료들의 천문학의 발전에 도움 되는 기초자료들이 되고 있다.

그는 "별의 세계는 변화가 크게 없다. 인간에게 100년은 삶과 죽음 등 변화가 크지만 별의 생애는 그리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며 "천문학은 새로운걸 하면서도 수백 년 전의 기초를 기반으로 한다. 현대과학에서 별의 이상이 확인되면 우린 100년 200년 전 자료를 뒤돌아봐야 한다. 우리 선조들의 천문학 기록을 복원해야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나 교수는 힘 닿는데까지 역서를 복원하고 싶다했다. 그는 "숭례문이 화재로 없어졌지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지 않았나. 역서도 마찬가지다. 역서를 복원하지 않은 채 그냥 두는 건 불탄 남대문을 그대로 두는 것 같다"며 "어떤 자료들은 오래돼 없어지고 망가졌고,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놓긴 했지만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아 연구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후손들이 몇 백 년이고 연구할 수 있도록 훼손된 물건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수리공으로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강조했다.